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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버지 외에는 술을 따르지 않는 법?"

길영(태민) 2005. 5. 28. 20:34

 

끝까지 글을 읽으셔야 이해를 하실겁니다....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신 친정 아버지가 딸들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치신 교육 중에 "아버지와 남편 외에는 술을 따르지 말아라"가 있었습니다.

종가였던 저희집은 일년 내내 대소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찾아오는 손님에게 찻상이나 술상을 대접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에 딸이었던 저는 남동생과는 달리 삼촌처럼 가까운 친인척분들에게조차 술을 따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술 따르는 것은 기녀가 하는 짓"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는 여자는 기녀(妓女)와 다름없다. 정숙한 집안의 규수는 남편과 아버지 외에는 술을 따르지 않는 법이다."


술을 즐기지 않던 친정 분위기에서 자란 저는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술을 따른다는 행위가 여성으로서 그리 보기에 좋은 장면은 아니라는 것 정도로만 이해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아버지 외의 남자에게 술을 따라야 했던 날은 저의 약혼식자리에서였습니다. 약혼식에 참석하신 양가 친척분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술을 한잔씩 돌리는데 굳이 신부가 따르는 술을 받기를 원하는 분들이 계셨던 것입니다. 거절할 수 없던 분위기 속에서 친정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아주 불편한 마음으로 몇 분의 술잔에 술을 따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뒤로도 저에게는 여러 번의 난감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술 자리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이 떠올라 편하게 혹은 기분 좋게 술을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남녀와 상하가 함께한 술자리에서 "저희 집에서는 아버지와 남편 외에는 술을 따르지 말라고 배웠거든요. 그래서 술을 따르지 않겠어요"라고 했다면 다들 저를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결국 아무리 불편해도 왕따가 되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말로 하거나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불편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 저는 술 따르기를 권하는 사람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별 것도 아닐 수 있는 일 즉, 술 따르기에 대해 성적 비하감이나 모욕감 등이 들게 가르친 보수적인 아버지를 탓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술자리에서 느낀 저의 불편함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보수적인 가정 교육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절구통에 치마만 둘렀어도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이다"라거나 "술은 장모가 따라도 여자가 따라야 제맛이다"라는 식의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술 따르기를 요구하는 남성들의 의식 속에 술을 따르는 여성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성적 서비스를 기대하는 심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 따르는 것 문제 삼으면 사회성 부족?


술자리에 술을 따르는 행위를 가지고 성희롱 운운하는 여성들에 대한 시각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여성들끼리도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이라거나 사회성이 부족하다거나, 유난스럽게 군다는등의 이유를 들어 비난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술을 따르는 행위에 대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여성들의 정신적인 피해를 미풍양속이나 관습이라는 모호한 이유를 내세워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술자리에 상대방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친근감의 표현입니다. 술도 음식이므로 연장자에게 먼저 술을 권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이며 술을 받은 연장자가 답례의 뜻으로 받은 술잔을 돌려주는 것 역시 정감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수치심을 느끼거나 성적모욕이라 생각하는 술 따르기는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의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상황 즉, 거절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어쩔수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술을 주고 받는 우리의 미풍양속은 계속 지켜지되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자괴감 등을 들게하는 강제적 술따르기와 술시중등은 사라져야 할 악습입니다. 이는 어찌보면 '여자는 아버지와 남편에게만 술을 따라야 한다'는 부모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한국 여성들만이 갖는 독특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술따르는 여성에 대한 성적비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여자는 아무에게나 술을 따라서는 않된다는 가정교육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불어질 문제일 것입니다.


간혹 술꾼들 중에는 대작(對酌)을 으뜸으로 친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칠순을 넘기신 친정 아버지는 자작(自酌)이 으뜸이요, 대작(對酌)과 수작(酬酌)은 그 다음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아마도 막무가내로 술을 권하거나 남녀를 막론하고 술을 따르게 하는 요즘 세태를 젊잖게 타이르시는 뜻이리라 생각됩니다. 술자리에서 여교사에게 술을 따르라고 시킨 교감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하며 문득 잊고 있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 것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미풍양속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이상 다음 뉴스에서 스크랩한 것입니다....